독서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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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우림 외곽에 위치한 사바나 기후는 독특한 건기가 특징. 수개월간 비 한방울 없이 계속되는 건기 동안 사바나의 생물들은 고통스러운 생존의 분투를 거듭한다. 가뭄과 불에도 죽지 않는 강인한 초지를 기반으로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번성하는 '야생의 천국'인 동시에, 혹독한 적자생존의 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고대 인류의 원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기도.

건조한, 절제된, 강인한 생명력. 이는 당신의 책 취향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생물처럼, 치밀한 계획 하에 쓰여진 정교한 책을 선호. 책이란 무릇 간결하고 정확한 내용이어야 함.

  • 대초원 위의 야생동물 같은:
    사바나의 고양이과 육식 동물처럼 유유자적 고상한 취향. 과격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나름 고상한 선택 기준을 갖고 있음. 아마도 경험이나 교육에 의한 분별력으로 추정됨.

  • 절제된 현실주의:
    멍청한 감상주의, 값싼 온정주의, 상투적 가족주의, 이런 것들로 장사하려는 상업주의를 배격함. 문화적인 보수 성향이 있음. 지나치게 독창적인 책보다는, 절제력과 품격을 갖춘 것을 더 선호함.

당신은 출판시장에서 가장 보기 드문 취향 중 하나입니다. 분명한 취향 기준이 있음에도 워낙 점잖은 탓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취향은 다음과 같은 작가들에게 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움베르트 에코
로마의 원형 경기장 시절부터, 인류는 줄곧 잔인한 구경거리를 좋아했다. 이런 소름 끼치는 고문에 대한 최초의 묘사 중 하나는 오비디우스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그는 아폴론이 한 음악 경연에서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를 패배시킨 후 산 채로 그의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실러는 소름 끼치는 것에 대한 이 "자연적 성향"을 아주 잘 정의했다.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처형이 벌어질 때면, 사람들은 그 장면을 구경하려고 항상 흥분해서 달려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만 영화관에서 유혈 낭자한 "스플래터" 영화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일 텐데, 그 영화가 허구로서 제시되는 이상 관객들의 양심이 흔들릴 일은 없는 것이다.
- 추의 역사 中

김승옥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 무진기행 中

J.D. 샐린저
"나는 특히 목사라는 인간들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내가 다닌 학교에는 모두 목사가 잇었는데 모두들 설교를 할 때마다 억지로 꾸민 거룩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이 역겨웠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면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 소리를 내는 것이 더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가 모두 거짓으로 들린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 호밀밭의 파수꾼 中




글쎄.
그렇다는 말이지......
개인적으로 에코도, 호밀밭의 파수꾼도, 무진기행도(샐린저와 김용옥의 소설은 각각 이 한권씩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오히려 다른 취향 영역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태생이 반골이라 어쩔 수 없이 비어져 나오는 본능인건지. 
 
 열대우림 형의 아멜리 노통브 - 그녀의 소설은 한 권 한 권이 도전이 된다. <살인자의 건강법>과 <적의 화장법>(제목이 가물가물하다) 에서 등장하는 그녀 특유의 대화는 마치 노련한 검객의 검투같은 느낌까지 준다. (프라즈 다르므.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 시대의 결투는 '검의 대화' 로 불리었다.) 내가 글을 쓰게 될 때, 지향하게 될 어떤 이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언쟁의 모습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구역질난다' 거나 '정신없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 남들이야 뭐라고 하던지.

 몬순 형의 박민규는 내가 젊은-물론 나보다는 나이가 많다- 작가층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다. <카스테라>나 <핑퐁>, <지구영웅전설>(이 책이 내가 최초로 접한 박민규의 책이었다. 책을 집어들게 된 동기는, 당연히 '은하영웅전설'이 떠올라서.)은 그렇게 구조적으로 안정된 작품은 아니다. 묘사는 종종 난해하고, 상황의 개연성은 모호하며 배경은 추상적이다. 하지만 읽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방금 읽은 것처럼 떠올릴 수 있는 뭔가가 있다. 난 이런 책이 매우 좋다.

 툰드라 형의 어슐러 K. 르귄은 어떤지. <어스 시의 마법사>를 읽어봤다면 그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전권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나는 책에 '의미있는'(스토리나 배경설정에 백분지 일의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설정병적인 것들 말고) 지도가 있는 경우를 좋아한다.

by lancet | 2010/04/25 14:35 | 메모 | 트랙백 | 덧글(3)

[영화리뷰]기술만 봐달라니까요! - 아바타(2009)/제임스 캐매런

1.
 일단 기술적인 측면에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세부적 CG기술은 이제까지 본 영화 중에 최고였던 것 같네요. 물론 딱 봐서 저게 진짜 실존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의 그래픽...까지는 아니고, 굉장히 현실감있는 그래픽이었지요. 근데 중요한 건, 그 '굉장히 현실감있는 그래픽'과 '실제 현실'이 마주치는 부분에서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주인공의 아바타가 입고 있는 옷과 아바타의 몸 사이, 그리고 지구인과 나비족이 마주칠 때 맞닿는 부분 같은 것들이 상당히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아바타가 진짜 있는건가?' 까지는 아니라도 '어, 저거 입고 있는 옷이나 들고 있는 총도 CG인건가?' 라는 생각은 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기술을 과시한다고 할까, 굳이 화려할 필요가 없거나 덜 화려한 편이 나아 보이는 부분에서도 그 가공할 그래픽을 선보이는 경우가 있어 몰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엄청난 기술력인 건 사실이네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괴물이긴 진짜 괴물인 듯. 기술점수를 따로 매기자면 9.2쯤 될 것 같네요.

2.
스토리는 좀 전형적입니다. 패권주의적이고 물질만능주의적인 집단과 그 집단에 의해 삶을 위협받는 선량하고 순수한 야만종족의 대립구도도 그렇거니와, 전자의 집단을 위해 일을 하던 사람이 야만종족에 감화된다는 설정 또한 뻔하다면 뻔한 것입니다. 영화 보면서는 이것저것 많이 생각났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 안 나고 <미션> 하나만 생각나네요. 나비족과 과라니족은 상당히 비슷하지 않나요. 물론 <미션>에서의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 같은 캐릭터는 없고, 결과적으로 좀 기적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전반적 구도는 <미션>과 상당히 흡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생각은 여러가지일 수 있습니다. 혹자는 나비 족의 생태를 통해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이 없으면 인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터이고, 저처럼 자연보호주의보다는 사람 살아가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약자가 가진 것을 빼앗고자 할 때 강자가 어떤 방안을 쓰게 되는지- 뭐 이런 얘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 (저는 좀 나아가서 비정규직 파업이랑 사측의 관계 이런거까지 생각이 막 진행되기도 했고요.) 미국의 패권주의적 행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멋진 미국 해병' 인 게 이런 생각을 조금 가리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하지만(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과 나비 족의 관계를 미국과 약소국의 관계로 치환시켜 바라볼 수 있기도 하지요. 전 꼭 미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들-이를테면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의-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 나비 족은 인도인이 되기도 하는 걸까요. 한편으로는, 영화 전체를 장자몽의 비유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이면서 나비이기도 하였더라. 그렇다면 나는 인간인가 나비인가 혹은 인간이면서 나비인가 아니면 그 아무것도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장자의 꿈에 나오는 것도 '나비'지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본인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뻔하다. 하지만 그 뻔함 때문에 선배 감독들이 영화에 녹여 놓은 치열한 고민 또한 어느정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정도의 생각으로 스토리 얘기를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스토리에서 눈에 걸리는 점이 있긴 했는데, 그런 얘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겠지요. 스토리에 점수를 매기자면, 7.4정도 되겠습니다.

3.
 영화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리가 불편한 전 미 해병대원이 드레나이랑 트롤의 중간쯤 되는 종족을 골라 와우를 시작하여 평작을 미친듯이 하다가, 와우에 빠져 와우가 현실인지 현실이 와우인지 헷갈리게 되는" 내용 되겠습니다.
영화의 결론은
1. 평작은 꾸준하게, 확고 찍을때까지 하는 것이 좋다.
2. 빠른날것은 느린날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함
3. 어휴 냥꾼 너무 많네요 냥풀요
정도 되겠습니다.

4.
근데 악역으로 나오던 간부님(...) 팔 되게 깔끔하게 접었던데, 팔을 접으려면 저렇게 접어야죠.
트루디 역의 미셸 로드리게즈가 좀 멋졌음......알렉스도 그렇고 미셸도 그렇고 로드리게스는 다 멋있네요(?!) 아참, 막시 로드리게스도 있군요!
나도 로봇 타고싶다 항가항가

by lancet | 2010/04/25 14:34 | 리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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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cet | 2010/04/25 14:32 | 앨범 | 트랙백 | 덧글(0)

[도서리뷰]나니아 연대기 - C.S 루이스

이게 도대체 책 받은 지 얼마나 오래 지나서 쓰는 리뷰인지- 책 받던 날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 됐군요. 이런 부분부분들에서는 참 '나란 인간도 참...'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정신좀 챙겨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도 마음대로 안 되네요. 뭐 어찌됐건.



서명 : 나니아 연대기
저자 : C.S 루이스
삽화 : 폴린 베인즈
역자 : 햇살과나무꾼
초판 1쇄 발행 : 2005.11.05

발행처 : 시공사
가격 : 32000 원


 



1. 아이들을 위하여
 '나니아 연대기' 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아동을 위한 최고의 판타지 소설' 이라는 겁니다. . 저 또한 이런 평에 동의합니다.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러한 특성은 세 가지 요소에 의해 구성됩니다. '아동들에게 맞는 주인공' 과, '아동들에게 맞는 세계관', '아동들에게 맞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죠.
 먼저, 이 책의 주인공들은 기껏해야 열둘, 열셋 정도의 어린 아이들입니다. 스토리가 거듭되며 이전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나이를 먹어 가지만, 각각의 시리즈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아이의 나이는 가장 많아 봐야 열 다섯 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열 다섯 소년은 극중에서 거의 '현명한 고령자' 수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요. 이 점을 통해, 이 책이 어느 정도의 나이대를 대상으로 쓰여진 책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환상문학의 주인공들은 잠재 독자의 나이수준에 맞는 나이, 혹은 정신연령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비슷한 나이대의 주인공들이 행동하고 사고하는 모습을 보며 더 깊은 공감 혹은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판타지 소설들이 주 독자층인 15~19세 정도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두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이 소설의 세계관과 이야기 전개 또한 아이들이 읽기 편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반지의 군주를 위시한 톨킨 시리즈처럼 방대한 설정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실제로 이제 막 현실의 세계관을 익힌 아동들의 경우 중간계와 같은 가상의 세계의 국가, 위치관계 등을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과하게 어두운 장면들에 맞닥드릴 일도 없지요. 슬픔이나 고난의 정도도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것들입니다. 전형적이며(적어도 서양권의 아이들에게, 아슬란의 죽음과 부활은 매우 익숙한 장면일 것입니다) 또 그 지속 정도도 길지 않지요.
 이러한 요인은 이 소설의 잠재독자층인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며, 동시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한 도서로 이 책을 선정하는 데에 힘을 실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이 항상 좋은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세계 3대 환상문학으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순위매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대개 어린이들이 아니라 성인들이고, 적어도 요즘의 대한민국에 한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어린이보다는 청소년 내지 성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에서 장점으로 언급한 것들이 성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할 때는 약간의 단점으로 작용하는데, 이를테면 스토리가 너무 단편적인 감이 있고 갈등의 고조와 해소가 너무 짧고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 등이 이러한 단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공감은 어릴 적의 추억 정도로 넘어간다고 해도 말이지요.

2. 지향할만한 가치
 '나니아 연대기'의 주목할만한, 하지만 잘 주목되지 않는 점은 이 책에서 내세우고 있는 가치가 실로 지향할 만하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일정한 사회적 규약 내지 도덕률을 중시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 점 또한 꼭 한번 언급하고 싶었던 점이지요. 앞의 장에서 이 책이 아이들이 읽기 좋게 쓰여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읽기 좋도록 책을 써 놓은 만큼, 아이들이 읽고 뭔가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가가 원하는 바였겠지요. 이 책은 많은 추천할만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갈등하고, 나약해지고, 종종 상대를 무시하는 등의 일도 저지르지만, 결국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옳은 길' 로 나아갑니다. 사실 앞의 잘못들 또한 '옳은 길' 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고요. 이 책을 읽음으로서 아이들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바람직한 가치를 함양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른들은 사회에 찌들어 사느라 잊고 있었던 가치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옳은 것' 이 무엇인지 흐려지고 있는 이 세대에, 이런 어찌 보면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요소 또한 한줄기 빛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요.

3. 누구를 위한 책인가
 사실 제 정도의 능력으로 '나니아 연대기' 같은 대작을 평한다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겠지요. 이미 많은 평이 나와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정도에서 책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두고 실제 눈앞에 보이는 '책' 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책을 맨 처음 보았을 때(도서부 일 때문에 렛츠리뷰 당첨되기 전에도 이 책을 본 적이 있지요), 바로 든 생각은 이 책이 과연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권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한 권으로 모아놓은 이 책은 그에 걸맞게 두껍고, 또 무겁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디트리히 슈바나츠의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제목만 봐도 두께가 짐작되시죠?)보다 조금 더 두껍네요. 내용은 아이들을 위한 책인데, 책의 형태는 아이들이 쉽게 읽을 만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어른들이 갑자기 이 책을 사서 읽을 것 같지도 않고요. 결국 이 책의 판매 대상은 '원래 나니아 연대기를 알던 사람들, 혹은 영화를 보고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 일 텐데, 사실 이런 대상 설정은 상당히 잘 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장용으로 가지고 있으려는 사람들에게도 만족스러울 디자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다' 라는 생각에서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나오는 것보다 일곱 권으로 분절되어서, 글씨도 좀 큼직큼직하게 애들 읽으라고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책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만 영화도 나온 시점에 말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줍니다. 사실 요새 아이들이 책을 너무 재미없어하는 것이 좀 걱정되기도 해서, 이정도의 책은 좀 아이들을 대상으로 풀려 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렛츠리뷰

by lancet | 2009/09/26 19:49 | 리뷰 | 트랙백 | 덧글(0)

고린도전서 13장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는 훨씬 더하고요. 개신교도로서 이런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결국 개신교 자체에 뭔가 욕먹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사회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교회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 원인을 기독교의 기본 이념인, 사랑의 실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너무 유명한 성경 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사람에 따라 이 구절을 받아들이는 방향은 다르겠지만, 저는 이것을 우열관계의 설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렇게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지면 좋을 것이되 어쩔 수 없다면 다른 것을 포기하고라도 사랑을 취하라. 이렇게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어떤가요. "믿지 않는 놈들은 어차피 지옥 갈건데 왜 살아. 살 가치가 없어" 하는 어느 목사의 말은, 개신교도로서 믿어야 하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는 부합할지 모릅니다. 구원론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고, 구원론을 믿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믿는 거죠. 하지만 저 말에, 과연 얼마만큼의 사랑이 들어있을까요. 아니, 사랑이 들어있기는 할까요? 
 이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애매한 말입니다. 또 우리가 흔히 쓰는 사랑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요. 성경에서는 사랑의 성질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 : 4 - 7)


 위에서 언급한 목사에게 진실로 이런 사랑이 있었다면, 과연 저런 식으로 말을 했을까요. 타인의 불신과 의심도 참고 견디며, 그들에게 온유하게 대하고, 무례함을 꺼리는 것이 제대로 된 기독교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사탄으로 규정해버린 추부길 씨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의 독기 어린 발언에 사랑은, 과연 얼마나 섞여 있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랑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유태교 교리의 핵심이 철저한 율법과 칼로 자르는 듯한 선악의 구분이라면,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최고로 칩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에 대비되는 사랑의 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면, 그에게 사랑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새 계명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 : 37 - 40)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경멸하신 것 또한 사랑이 결핍된, 바리새인의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칭하시는데, 이는 결국 사탄과 같은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 저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남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하루하루 내뱉는 말들, 한 순간 한 순간 행하는 일들은 바리새인의 그것입니까 아니면 사랑의 그것입니까. 기독교는 사랑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랑은 관용이고 온유함입니다. 이 관용과 온유함만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먹은 기독교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사랑은 믿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이 서로 배치되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거리낌없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 것입니다. 사랑의 우월함에 대해, 흔히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 모두는 이 구절을 마음 깊이 새겨넣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 : 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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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시작할 때는 모 목사들 까는 글이었는데
써놓고 보니 (짧다는 점에서) 썩 훌륭한 설교문인듯? (...)
근데 저 스스로부터 좀 다잡아야죠 넵  

by lancet | 2009/03/22 19:31 | 연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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